침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신앙을 고백하고, 죄에 대하여 죽고 새 생활을 살려는 우리의 의도를 나타내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서 인정하여, 그분의 백성이 되고 교회의 일원이 된다. 침례는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연합, 우리 죄의 용서, 성령을 받아들임에 대한 상징이다. 이 예식은 물에 잠그는 방식으로 행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죄를 회개한 증거가 확인될 때 베풀어진다. 침례는 성경을 가르쳐서 그 가르침들을 받아들인 후에 시행된다. -기본 신조, 15.
중앙 아프리카에 살았던 니앙위라(Nyangwira)는 침례를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괜찮은 사항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 여인은 1년 이상 열심히 성경을 공부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열망했다.
어느 날 저녁, 그녀는 그동안 배운 진리를 남편에게 소개했다. 남편은 격노하여 “우리 집에 이따위 종교는 필요 없어. 계속 공부하면 죽여버릴 테야”라고 소리쳤다. 낙담은 되었지만 니앙위라는 성경을 계속 공부했고 침례 받을 준비를 끝냈다.
침례식에 가기 위해 출발하면서 니앙위라는 남편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오늘 침례 받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남편은 그의 사냥칼을 집어들며 “네가 침례 받는 것을 내가 원치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침례 받는 날이 곧 네가 죽는 날인 줄 알아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기로 단호히 결심한 니앙위라는 남편의 위협이 귀에 쟁쟁히 울리는 가운데 떠났다.
물에 들어가기 전 그는 자신의 죄들을 고백하고, 오늘 또한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게 될런지는 알 수 없지만 생애를 그의 주님께 드렸다. 침례를 받았을 때 그의 마음에 평화가 가득 찼다.
집에 돌아온 그는 칼을 남편에게 가져 왔다.
“너 침례 받았느냐?”라고 남편이 화를 내며 물었다.
“네”라고 그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여기 칼이 있어요.”
“죽을 각오는 되어 있겠지?”
“네, 되어 있어요.”
그의 용기에 놀란 남편은 더 이상 그를 죽이려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침례는 얼마나 중요한가?
침례는 생명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참으로 침례를 요구하시는가? 구원은 침례를 받는 여부에 달려 있는가?
예수님의 모본. 어느 날 예수님은 나사렛의 목공소를 떠나시면서 그의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시고 그의 친척 요한이 설교하고 있던 요단강으로 갔다. 그분은 요한에게 가까이 가셔서 침례를 베풀어줄 것을 요청하셨다. 요한은 놀라서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하고 말하면서 만류했다.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로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침례로 이 예식*은 영원히 하나님의 승인을 받았다(마 3:13-17, 21:25 참조). 침례는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의의 한 부분이다. 무죄하신 분 그리스도께서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침례를 받으셨으므로 죄인인 우리들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계명. 당신의 공생애 끝에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명령하셨다.
이 분부 가운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영적 왕국, 즉 당신의 교회의 일원이 되기를 소망하는 자들에게 침례를 요구하심을 명백히 하셨다. 제자들의 봉사를 통하여 성령께서 백성들을 회개케 하고 예수를 그들의 구주로 받아들이게 하실 때 그들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들의 침례는 그들이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에 들어갔음과 그의 은혜의 왕국의 원칙들에 조화되는 생애를 살기로 약속함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침례를 베풀라는 당신의 명령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보증으로 끝맺으셨다.
그리스도의 승천 후 사도들은 침례의 필요성과 긴급성을 선포했다(행 2:38, 10:48, 22:16). 이에 호응한 무리들이 침례를 받았으며, 그들이 신약의 교회를 형성했고(행 2:41, 47, 8:12)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권세를 받아들였다.
침례와 구원. 그리스도는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막 16:16)이라고 가르치셨다. 사도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곧 침례를 베풀었다. 그것은 새신자의 믿음에 대한 확인이었다(행 8:12, 16:30-34 참조).
베드로는 침례와 구원의 관계를 예시하기 위해 홍수시 겪은 노아의 경험을 사용했다. 홍수이전 시대에 죄는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회개하든지 멸망을 당하든지 선택하라고 세상을 경고하셨다. 단 여덟 사람만 믿고 방주에 들어갔고, 그들은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베드로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0, 21)고 말했다.
베드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듯이, 우리는 침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물론 홍수의 물이 아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다. 신자에게서 죄를 제거하는 것은 침례의 물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이다. “그러나 침례는 방주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노아의] 순종처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찾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준비된 구원이 효력이 발생한다.”*
그러나 침례는 구원과 매우 필수 불가결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구원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험을 침례의 한 상징적 표상으로 간주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통과할 때 위의 구름과 양편의 물로 말미암아 “물 속에 잠김으로” 상징적으로 침례를 받았다. 이러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다(고전 10:1-5). 그와 같이 오늘날도, 침례가 자동적으로 구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경험은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1, 12).
“침례도 하나이요”
그리스도 교계에서 침례를 시행하는 방법은 각양 각색이다. 어떤 이들은 물에 잠금(immersion), 혹은 담금(dipping)으로 하고 다른 이 들은 성수 살포(aspersion) 혹은 또 다른 이들은 관수식(affusion, 灌水式), 혹은 물붓기(pouring)방식으로 한다. 성령께서 교회에 가져다 주시는 일치성의 특색은 “침례도 하나”(엡 4:5)이다.* 성경은 “침례 주다”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하여, 그 관습 자체, 그리고 그 영적 의미에 관하여 무엇을 계시해 주고 있는가?
“침례를 베풀다”라는 단어의 의미. “침례를 베풀다”(baptize)라는 영어 단어는 헬라어 동사 밥티조(baptizo)로부터 왔으며 그 의미는 물에 잠금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안에 담그다 혹은 밑에 담그다”*를 의미하는 동사 밥토(bapto)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침례를 베풀다”라는 동사가 물의 침례를 지칭할 때 그것은 물 속에 한 사람을 잠금 혹은 담금의 개념을 담고 있다.*
신약에서 “침례를 베풀다”라는 동사는 (1) 물의 침례를 지칭하기 위하여(예컨대, 마 3:6; 막 1:8; 행 2:41), (2)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은유로(마 20:22, 23; 막 10:38, 39; 눅 12:50), (3) 성령의 강림에 대하여(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11:16), 그리고 (4) 목욕(ablutions) 혹은 손을 의식적(儀式的)으로 씻는 일(막 7:3, 4; 눅 11:38) 등에 사용되었다. 이 네번째 용례는 단순히 의식상의 부정을 정결케 하기 위한 씻음을 의미하며 물붓기에 의한 침례의 합법성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물 침례와 그리스도의 죽음 모두에 대하여 침례라는 명사를 사용한다(마 3:7, 22:20)
호와드(J. K. Howard)는, 신약에는 “물 뿌림이 사도적 관습이 된 적이 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모든 증거를 취합해 볼 때 그것이 후기에 도입된 것임이 명백해진다”*고 말하였다.
신약의 침례. 신약에 기록된 물로 침례를 베푼 사례들은 물에 잠금이 수반되었다. 우리는 요한이 요단강 (안)에서(마 3:6; 막 1:5 참조)그리고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요 3:23)는 말씀을 읽는다. “많은 물”은 물에 잠금으로 시행하는 침례 때만 필요 된다.
요한은 예수님을 물 속에 잠갔다. 피는 “요단강 (안)에서” 예수께 침례를 베풀었으며, 침례 후에 예수님은 “물에서 올라 오”(막 1:9, 10; 마 3:16 참조)셨다.*
사도 교회도 물에 잠금으로 침례를 베풀었다. 전도자 빌립이 구스 내시에게 침례를 베풀었을 때 둘 다 “물에 내려”갔고 “물에서 올라”(행 8:38, 39 참조)왔다.
역사 가운데 나타난 침례. 그리스도 이전시대 유대인들은 그들의 이방인 개종자들을 물에 잠금으로 침례를 베풀었다. 쿰란의 에세네파(The Essenes)는 그들의 단원들과 회심자들을 모두 물에 잠그는 관습을 따랐다.*
지하 동굴이나 교회의 그림이나 벽화, 바닥, 벽, 천장의 모자이크, 조각된 부조, 그리고 고대 신약 시대의 그림들이 제공하는 증거들은 “물에 잠금이 첫세기부터 14세기까지 그리스도 교회의 정상적인 침례 방식임을 압도적으로 증명한다.”* 북아프리카, 터어키,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그 밖의 지역에 있는 고대 성당, 교회 그리고 폐허 등에서 발견되는 침례탕들은 아직도 이 관습이 옛적부터 시행되어 온 제도임을 증거한다.*
침례의 의미
침례의 의미는 그 시행 방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플러머(Alfred Plummer)는 “침례가 물에 잠금에 의해 시행되었을 때에만 그 예식의 충만한 의미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상징. 물로 덮이는 것이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상징했듯이(시 42:7, 69:2, 124:4, 5) 예수님의 물 침례는 그분의 고통, 죽음, 그리고 장사지냄에 대한 예언적 실연(實演)을 상징했으며(막 10:38; 눅 12:50), 그분께서 물에서부터 올라오심은 그분의 뒤이은 부활을 상징했다(롬 6:3-5).
“사도 교회가 물에 잠금이 아닌 다른 침례방식으로 침례를 베풀었다면, 침례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상징으로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물에 잠금에 의한 침례에 대한 가장 강력한 논증은 신학적인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에 대한 상징. 침례로 신자들은 우리 주님의 수난의 경험 속으로 들어간다.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 4)고 말하였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의 밀접성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리고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등의 표현을 통해 드러났다. 호와드는 이렇게 주석하였다. “침례라는 상징적 행위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며 진정한 의미에서 그분의 죽음이 그의 죽음이 된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분의 부활이 그의 부활이 된다.”*
1. 죄에 대하여 죽음. 침례로 신자들은 “그(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롬 6:5)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갈 2:20)다. 이것은 “우리(의)… 죄된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음이니라”(롬 6:6, 7)를 의미한다.
신자들은 그들의 옛 생활 방식을 포기하였다. 그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이전 것은 지나갔”(고후 5:17)다는 것과 그들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인 바 되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침례는 옛 생활 방식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상징한다. 그것은 죽음뿐 아니라 장사지냄도 상징한다. 우리는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골 2:12)되었다. 사람이 죽은 후 장례가 뒤따르듯이 신자가 물 무덤으로 내려질 때, 그가 예수를 받아들임으로 끝나버린 옛 생활은 장사지낸 바 된다.
침례로 신자들은 세상을 포기하였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는 명령에 순종하여 후보자들은 사단을 섬기기를 포기한 것과 그리스도를 그의 생애 가운데로 영접하였음을 공표한다.
사도 교회에서 회개에로의 초청에는 침례로의 초청이 포함되었다(행 2:38). 그와 같이 침례는 또한 참 회개를 표시했다. 신자들은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피를 통하여 죄 용서함을 얻는다. 침례 예식은 내적 정결케 함, 즉 고백된 죄들을 씻어버리는 것을 표현한다.
2. 하나님께 대하여 삶.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살아 움직인다. 그것은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롬 6:4), 즉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롬 6:11)로 행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옛 본성을 이기고 승리하는 생애를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성령의 역동적 능력을 통하여 새로운 영적 생명을 제공해 주신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있음을 증거한다. 이 새 생명은 차원 높은 인생살이의 경지로 우리를 끌어올리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에 초점을 둔 새 가치관, 새로운 포부와 희망을 우리에게 준다. 우리는 우리 구주의 새 제자들이며 침례는 우리의 제자된 증거의 표징이다.
언약 관계의 상징. 구약 시대의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 관계를 표시 했다(창 17:1-7).
아브라함의 언약은 두 가지 면, 즉 영적인 면과 국가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다. 할례는 민족적 동일성의 표였다. 아브라함 자신과 그의 가족 중 태어난 지 8일 이상된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아야 했다(창 17:10-14, 25-27). 할례 받지 않은 남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었는데 이는 그가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이었다(창 17:14).
그 언약이 하나님과 성인(成人)인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졌다는 사실은 그것의 영적인 차원을 드러낸다. 아브라함의 할례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대한 그의 이전의 경험을 의미했고 또 확증했다. 그의 할례는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롬 4:11)이다.
그러나 할례 그 자체만으로는 그 언약의 참 영적 차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증해주지 못했다. 자주 하나님의 대변자들은 참으로 영적인 할례만이 그것을 충족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30:6; 렘 4:4 참조).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자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형벌을 받을 것이었다(렘 7:25, 26).
유대인들이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거절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깨뜨렸으며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그들의 특별한 신분에 종지부를 찍었다(단 9:24-27; 본서 4장 참조). 하나님의 언약과 그분의 약속들은 변동이 없었지만 그분은 한 새 백성을 선택하셨다. 영적 이스라엘이 유대 국가를 대체했다(갈 3:27-29, 6:15, 16).
그리스도의 죽음은 새 언약을 비준했다. 백성들은 영적 할례, 즉 예수의 속죄의 죽음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통하여 이 언약에 들어갔다. 그리스도인들은 “무할례자에게 복음”(갈 2:7)을 가지고 있다. 새 언약은 영적 이스라엘에 속하려는 자들에게 “내적 믿음”을 요구하며 “외적 의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면서부터 유대인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오직 새로남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 이니라”(갈 5:6). 중요한 것은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롬 2:29) 것이다.
예수와 맺은 구원하는 관계의 표징인 침례는 이 영적 할례를 대표한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 12).
“‘육의 몸’이 예수가 행하신 영적 할례를 통하여 제거된 후에 침례 받은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로 옷 입고’ 예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간다. 그 결과 그는 언약의 약속들의 성취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7-29). 이 언약 관계에 들어간 자들은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는 하나님의 보증을 경험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한 헌신의 상징. 예수님은 침례 받으실 때 당신의 기름부음 혹은 당신의 아버지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사명에의 헌신을 상징하는 성령의 특별한 부어주심을 받았다(마 3:13-17; 행 10:38 참조). 그분의 경험은 물의 침례와 성령의 침례는 합일하는 것이며, 성령을 받음이 없는 침례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도 교회에서 성령의 부어주심은 대체로 물의 침례에 뒤따랐다. 그와 같이 오늘날에도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을 때 우리는 헌신케 되고, 성별 되고 영원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하늘의 세 위대한 권세들과 연합된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서 죄를 정결케 하심으로 이러한 봉사를 하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요한은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마 3:11)이라고 선언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사 4:4)으로 백성들의 더러움을 씻으실 것이라고 제시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사 1:25)리라고 말씀하셨다. 성령은 그분께 굴복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애를 정결케 하시고 그들의 죄를 소멸하실 것이다.
그러고 나서 성령은 당신의 은사들을 그들에게 주신다. 그분의 은사들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것들로서 침례시 주어지며, 신자들로 교회를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성령의 침례는 초대 교회에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행 1:5, 8). 그리고 그 동일한 침례만이 교회가 영원한 천국복음을 선포하는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마 24:14; 계 14:6).
교회에 입교하는 상징. 사람의 중생 혹은 거듭남(요 3:3, 5)의 표징으로서 침례는 또한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에 그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나타낸다.* 침례는 새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기 때문에 교회로 들어가는 문으로서의 기능을 한다. 침례를 통하여 주님은 당신의 몸인 교회에 새 제자들을 더하신다(행 2:41, 47; 고전 12:13). 그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 교회 가족에 가입함이 없이 침례를 받을 수는 없다.
침례 받을 자격
성경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관계를 결혼에 비유한다. 결혼에서 쌍방은 거기에 수반되는 책임과 서약을 잘 알아야 한다. 침례 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침례의 의미와 침례후의 영적 관계의 의미를 이해할 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에 믿음, 회개, 그리고 회개의 열매를 드러내야 한다.*
믿음. 침례의 선행 조건 중 하나는 예수의 속죄 희생을 죄로부터 구원받는 유일한 수단으로 믿는 믿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막 16:16)이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믿는 자들만이 사도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행 8:12, 36, 37, 18:8).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롬 10:17)음으로 가르침은 침례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분부는 이러한 가르침의 중요성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 20). 제자가 되는 데는 철저한 가르침이 필요 된다.
회개.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행 2:38)으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믿음뿐 아니라 회개와 회심도 유발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백성들은 그들의 잃어버린 상태를 인식하고 그들의 죄악 됨을 고백하고 자신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키고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의 새 생활에 자신들을 헌신한다. 회개를 통해서만 그들은 침례의 선행 조건인 죄에 대한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
회개의 열매들. 침례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공언해야 하고 경험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마 3:8)를 맺지 아니한다면 그들은 성서적 침례 자격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의 생활은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증명해야 하며 그분의 계명에 순종함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침례를 준비함에 있어서 그들은 이미 그릇된 신조와 관습들을 당연히 포기했어야 한다. 그들의 생활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그리고 그들이 그분 속에 거한다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요 15:1-8).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증거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아직 교회에 입교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것이다.*
후보자 심사. 교회의 일원이 되는 데는 영적 계단을 밟는 일이 수반된다. 이것은 단순히 녹명책에 이름을 올려놓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침례를 시행하는 자들은 후보자들이 침례 받을 준비가 갖추어져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책임이 있다. 그들은 교회가 표방하고 있는 원칙들을 후보자들이 이해하여 새로 남의 증거를 나타내고있는지, 그리고 주 예수 안에서 즐거운 경험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침례를 받고자 하는 자들의 동기를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교인이 되기 위하여 지망할 때 우리는 그의 생애에 나타난 열매를 시험해야 하되, 그의 동기에 대한 책임은 그 자신에게 맡겨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산 채로 침례의 물 속에 장사되었다. 자아는 죽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지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에 입교한 사람들은 연약함과 배도의 씨앗들을 들여왔다. 그들의 “성화 되지 못한” 영향은 교회 안팎의 사람들을 혼란케 하고 교회의 증거 활동을 위태롭게 만든다.
유아들과 아이들이 침례를 받아야 하는가? 침례는 “거듭남”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새 신자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입교시킨다. 그들의 회심은 그들에게 침례와 교인됨의 자격 요건을 충족시켰다. 입교는 “아이의 출생” 때가 아니라 “새로 남”(중생)의 때에 일어난다. 그것은 왜 믿는 자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침례를 받았는지를 설명해 준다(행 8:12, 13, 29-38, 9:17, 18, 고전 1:14). 칼 바르트(Karl Barth)는 “신약 성서 그 어느 곳에서도 유아 세례(침례)는 허용되지도 않았고 명령되지도 않았다”*고 인정하였다. 비슬리-머레이(G. R. Beasley-Mur-ray)는 “나는 분명히 유아 세례 가운데서 신약교회의 침례를 인정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유아들과 어린이들은 회심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침례를 받기에 부적합하다. 이것은 그들이 새 언약 공동체에서 제외된다는 의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당신의 은혜의 왕국에서 그들을 제외시키지 않으셨다. 그분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마 19:14, 15)셨다. 믿는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인도하여 마침내 그들이 침례 받도록 함으로써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축복하여 주심을 바라고 그분께 자녀들을 데려온 어머니들에 대한 예수님의 적극적인 반응이 어린이 봉헌을 행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예식을 위하여 부모들은 하나님께 바치거나 봉헌하기 위하여 그들의 자녀들을 데려온다.
몇 살이 되어야 침례를 받을 준비가 갖추어질까? 각 개인은 그들이 (1) 침례의 의미를 이해할 만큼 성숙되고, (2)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고 회심하였으며, (3) 그리스도교의 기본 원칙들을 이해하고, (4)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이해한다면 침례를 받을 수 있다. 그들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해서 성령의 감동을 거절할 때에만 자신의 구원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영적 성숙에 도달하는 연령은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어린 나이에 침례 받을 태세가 갖추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 가능한 최연소 연령을 고정적으로 못박을 수 없다. 부모가 그들의 자녀들이 어린 나이에 침례 받는 것에 동의할 때 그들은 그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고 품성을 발전시킬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침례의 열매
침례가 맺혀주는 탁월한 열매는 그리스도를 위해 산 생애이다. 목표와 포부는 자아가 아닌 그리스도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1, 2). 침례는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봉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증가시키는 계획에 따라 다른 이들을 섬기는 데 사용될 그리스도인 은혜들을 습득한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2). 우리가 우리의 침례 서약을 충성스럽게 준수할 때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침례 받은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는 침례 후 살아가면서 맞을지도 모를 모든 비상 사태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적 능력을 얻을 수 있음을 보증하신다.
둘째 열매는 그리스도 교회를 위해 산 생애이다. 우리는 더 이상 고립된 개인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성전은 산 돌들인 우리들로 구성된다(벧전 2:2-5). 우리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분으로부터 사랑 가운데서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한 매일의 은혜를 받는다(엡 4:16). 우리는 언약 공동체내에서 책임들을 맡으며, 그 구성원들은 새로 침례 받은 자들을 위하여 책임을 진다(고전 12:12-26). 이 새 교인들은 교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예배와 기도와 사랑의 봉사생활에 참여해야 한다(엡 4:12).
마지막 열매는 세상에서 세상을 위하여 산 생애이다. 침례 받은 우리들이 하늘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빌 3:20).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훈련을 받고 세상에 섬기는 종으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참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교회 안으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선교사로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태어났다. 우리의 침례 언약에 대한 충실성에는 이들을 은혜의 왕국으로 인도하는 일이 포함된다.*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가 풍성한 생활로 들어가기를 몹시 고대하신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 2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