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기본교리 28

제14장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연합

교회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들 가운데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로 구성된, 많은 지체를 가진 한 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들 사이에서 민족, 문화, 학문, 국적 등의 구별이나 높은 자와 낮은 자,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간의 차별이 분열의 요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 상호간을 하나의 친교에로 결속시키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 우리는 편견이 없이 솔직하게 서로 섬기고 또 섬김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같은 신앙과 소망을 나누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별을 가지고 나아간다. 이러한 연합은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 삼위 하나님이 일체가 되신 것에 근원을 두고 있다. -기본 신조, 14.

지상에서의 당신의 사업을 끝마치신 예수님은(요 17:4) 운명하시기 전날 밤에도 당신의 제자들의 상태 때문에 계속 고뇌하셨다. 질투심 때문에 누가 가장 크며,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겸손이야말로 당신의 왕국의 진수이며 당신의 참된 추종자들은 감사의 표시조차도 기대하지 말고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쇠 귀에 경 읽기였다(눅 17:10). 발 씻겨주는 행동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 때문에 아무도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을 때 예수께서 허리를 굽히시고 그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보이셨던 모본까지도 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본서 15장을 보라).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대중들이 그분을 계속 따른 것은 그분의 동정심 때문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이러한 무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유대인, 여인들, 죄인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강한 편견으로 가득 찼었다. 그러한 편견은 이 천대받는 사람들에게까지 보이시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평판이 좋지 못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는 것을 발견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그들은 누르러 추수하게 된 밭에 추수를 기다리는 온갖 종류의 곡식들이 있다는 것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통, 여론, 혹은 가정의 통제조차도 그리스도를 흔들어 놓을 수는 없었다. 그의 마음에서 억제할 수 없는 사랑이 흘러나와 이즈러진 인간성을 회복시켰다. 부주의한 대중과 그들을 구별시켜 줄 이러한 사랑이야말로 그들이 참 제자라는 증거가 될 것이었다. 그분께서 사랑하신 대로 그들도 사랑해야 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의 공언 때문이 아니라 그들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시 때문에 언제나 구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요 13:34, 35 참조).
그와 같이 겟세마네 동산에서까지, 그리스도의 마음의 주요 관심사는 “세상 중에서”(요 17:6) 나온 자들인 당신의 교회의 연합이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는 일치와 유사한 연합이 교회 내에도 있게 해주시기를 당신의 아버지께 탄원하셨다. 내가 기도하옵는 바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이러한 연합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강력한 증거의 도구이다. 왜나하면 그것은 인류에 대한 그리스도의 무아적 사랑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함이로소이다”(요 17:23)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상 연합과 교회
오늘날의 가시적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종류의 연합을 염두에 두셨는가? 어떻게 이러한 사랑과 연합이 가능할까? 그 기초는 무엇이며 그 구성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획일성을 요구하는가 아니면 다양성을 허용하는가? 연합이 어떻게 기능을 발휘하는가?

성령의 연합. 성령은 교회의 연합의 배후에 있는 원동력이다. 그분을 통하여 신자들은 교회로 인도함을 받는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고전 12:13)이 된다. 이 침례 받은 교인들은 바울이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엡 4:3)으로 기술한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
사도는 성령의 하나됨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열거했다. 그는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4-6). 하나라는 낱말의 7중 반복은 바울이 마음속에 그린 완전한 연합을 강조한다.
성령께서는 각 나라와 인종 가운데서 사람들을 불러내어, 침례를 통해 그들을 한몸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으로 만드신다. 그들이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날 때, 문화적 차이점들은 더 이상 분열시키는 요소가 되지 않는다. 성령은 높은 자나 낮은 자, 부자나 가난한 자, 남자나 여자 사이의 장벽을 허무신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모두가 동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로 존경하며 받든다.
이 연합은 집합적 수준에도 해당된다. 즉, 어떤 교회는 다른 나라로부터 자금과 선교사를 지원 받고 있을지라도 전 세계의 각 지역 교회는 모두가 동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영적 연합에는 어떤 계급 제도도 없다. 본방인이건 선교사이건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
연합된 교회는 한 소망 즉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실현될 구인의 “복스러운 소망”(딛 2:13)을 가지고 있다. 이 소망은 평화와 기쁨의 근원이며 연합하여 증거할 강력한 동기를 제공한다(마 24:14), 이 소망은 변화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요일 3:3)기 때문이다.
모두가 몸의 한 부분(지체)이 되는 것은 공통적인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에 대한 개인적 믿음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한 침례(롬 6:3-6)는 이 믿음을 완전하게 표현하며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었음을 증거 한다.
끝으로, 성경은 한 성령, 한 주, 그리고 한 하나님, 한 아버지가 있음을 가르친다. 교회 연합의 모든 면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 속에서 그 기초를 발견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고전 12:4-6)다.

연합의 범위. 신자들은 정신과 견해의 일치를 경험한다. 다음의 권고에 주의해 보자.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5, 6).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의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후 13:11).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당연히 감정과 사상과 행동의 일치를 드러내야 한다. 이 말은 각 교인들이 동일한 감정과 사상과 행동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성서가 말하는 일치는 획일성을 의미하는가?

다양성 속의 일치. 성서가 말하는 일치는 획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체에 대한 성서의 은유는, 교회의 일치가 다양성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몸에는 많은 기관이 있다. 모든 기관들은 신체가 최적으로 활동하는 데 기여한다. 각 기관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하나같이 필수적인 임무를 완수한다.
이 동일한 원칙이 교회 내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사들을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고전 12:11)사 회중에게 유익을 주는 건전한 다양성을 이루어 주신다. 모든 신자들이 똑같은 생각을 품거나 같은 일을 할 자격을 부여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모두는 한 성령의 지도 아래 움직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능력들을 최선껏 활용하여 교회를 강화시킨다.
교회가 그 사명을 성취하려면 모든 선물들의 기여가 필요 된다. 그것들이 합쳐졌을 때 총력전도 사업이 추진될 수 있다. 교회의 성공은 각 신자들이 모두 같은, 동일한 일들을 하는 데 달린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할당하신 임무를 수행하는 데 달려있다.
천연계 가운데, 가지가 달린 포도나무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다. 예수님은 자신과 신자들의 연합을 묘사하는 데 포도나무의 은유를 사용하셨다(요 15:1-6). 즉 신자들을 대표하는 가지들은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연장(延長)들이다. 가지나 잎사귀 그 어느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체성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모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자양분을 동일한 근원인 그 포도나무로부터 공급받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의 가지는 하나 하나마다 독립되어 있으며,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각 가지는 그들이 같은 원줄기에 붙어 있는 한 다른 가지들과 상통하게 된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근원으로부터 동일한 자양분을 공급받고 생명을 주는 동일한 원소들을 흡수한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접붙임 받는 데 달려 있다. 그리스도인 생애를 활력 있게 만드는 능력은 그분으로부터 온다. 그분은 교회의 임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재능과 능력의 원천이시다. 그분께 연결됨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취미와 습관과 생활 방식을 꼴 짓는다. 그분을 통하여 모든 신자들은 상호간에 연결되며 공동의 사명에 참여한다. 신자들이 그분 안에 거할 때 이기심은 쫓겨가고 그리스도인 연합이 확립되어, 그들로 그분의 사명을 성취할 수 있게 해준다. 그와 같이 교회 안에는 기질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있지만 모두가 한 머리 아래서 일한다. 많은 은사들이 있지만 성령은 오직 하나이시다. 은사들은 각기 다르지만 조화된 행동이 있다.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2:6).

믿음의 일치. 그러나 은사의 다양성이 신조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교회는 영원한 복음의 강령을 함께 나누는 백성들, 그들의 생활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준수하는 것으로 특징을 이루는 사람들로 구성될 것이다(계 14:12). 그들은 함께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을 선포할 것이다.

교회의 연합은 얼마나 중요한가?
연합은 교회에 필수 불가결하다. 그것이 없다면 교회는 그 거룩한 사명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연합은 교회의 노력을 효율적으로 만든다. 불화와 다툼으로 찢긴 세상에서, 개성과 기질과 성격이 각기 다른 교인들 가운데 존재하는 사랑과 연합은 그 무엇보다도 더 강력하게 교회의 기별을 증거한다. 이러한 연합은 하늘과 그들이 연결된 것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그들의 신임장의 유효성에 대한 논박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요 13:35).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입증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 사이의 알력은 불신자들 가운데 혐오감을 일으키며 아마도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장애 요인이 되어 왔다. 신자들간의 진정한 연합은 이러한 태도를 방지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이야말로 그분께서 그들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주는 한 주요 증거가 된다고 말씀하셨다(요 17:23).

연합은 하나님의 왕국의 실재를 보여준다. 참으로 연합된 이 땅의 교회는 그 신자들이 하늘에서 함께 살게 될 날을 진지하게 고대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지상에서의 연합은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의 실재를 증명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다음의 성경 말씀이 성취될 것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연합은 교회의 능력을 보여 준다. 연합은 능력을 가져오고 분열은 연약을 초래한다. 교인들이 그리스도와 그리고 피차간에 연합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조화롭게 일하는 교회는 참으로 번영하고 강력하다. 바로 그렇게 될 때에만 그들은 가장 진실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들”(고전 3:9)이다.
그리스도인 연합은 사랑이 없는 이기심에 의해 찢기고 날로 분열되어 가는 세상에 도전한다. 하나됨을 이룩한 교회는 문화, 인종, 성 그리고 국적에 의해 분열된 사회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참으로, 흑암의 권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대로 신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교회를 공격하는 데는 무력하다.
하나됨을 이룩한 교회의 적극적이고 아름다운 결과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비교할 수 있다. 지휘자가 등장하기 조금 전, 연주자들이 그들의 악기를 조율하고 몸을 풀고 있을 때 불협화음이 연출된다. 그러나 지휘자가 나타날 때 혼잡한 소음이 그치고 모든 시선은 피에게 집중된다. 관혁악단의 각 단원은 그가 지시하는 대로 연주할 태세를 갖추고 앉아 있다.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관현악단은 아름답고 조화된 음악을 연주해 낸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연합은 거룩한 지휘자 즉 하나님의 지휘봉 아래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로 구성된 관혁악단 내에서 나의 생애의 악기를 조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창작자의 원래악보에 맞춰 그분의 지휘에 따라, 우리는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의 교향곡을 연주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

연합의 성취
교회가 연합을 경험하려면, 신성과 신자들 모두가 그것을 이루어내는 데 관여해야 한다. 연합의 근원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룩할 수 있는가? 신자들은 그 일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가?

연합의 근원. 성경은 연합의 관원이 (1) 아버지의 보존시키는 능력과(요 17:11), (2) 그리스도께서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셨던 아버지의 영광(요 17:22)과, (3) 신자들 속에 그리스도의 내재하심(요 17:23)이라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은 각 지체들의 연합을 유지시키는 결합력이요 실재이시다.
바퀴통과 바퀴살처럼 교인들(바퀴살)이 그리스도(바퀴통)께 더 가까이 나아갈수록 그들 상호간에 거리가 더 가까워진다. “교회와 가정에서의 진정한 연합의 비결은 수완이나 경영 능력이나 난관을 극복하려는 초인간적인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어느 정도의 효력이 있겠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진정한 연합의 비결이다.”*

연합시키는 분이신 성령.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연합을 이루신다.
1. 연합의 초점.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들어가실 때 그분은 그들로 하여금 문화, 인종, 성, 피부색, 국적 그리고 신분에 대한 인간의 편견을 초월시키신다(갈 3:26-28 참조). 그분은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모셔오심으로 이 일을 성취하신다.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그들의 연합은 그들 가운데 연합의 결속을 확립시키는데, 그것은 내재하시는 성령의 열매이다. 그 때에 그들은 그들의 의견차이와 불화를 최소화하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함께 연합하여 사명을 수행할 것이다.
2. 연합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영적 은사들의 역할. 교회의 연합의 목표는 얼마나 달성이 가능한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당신의 아버지 곁에서 당신의 중보 사업을 시작하셨을 때, 그분은 당신의 백성들을 연합시키려는 목적이 환상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셨다. 성령을 통하여 그분은 신자들 가운데 특별히 “믿음의 연합”을 확립시키고자 특별한 은사들을 주셨다.
이 은사들을 논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고 말했다. 이 은사들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엡 4:11-13)게 하기 위하여 교회에 주어졌다.
이 특수한 은사들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믿는 것에 하나”(엡 4:3, 13)가 되도록 발전시켜 신자들이 성숙하고 견고하여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엡 4:14) 되도록 의도되었다(본서 16장 참조).
이 선물들을 통하여 신자들은 사랑 가운데서 진리를 말하고 사랑의 역동적 연합을 발전시키면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이르기까지 성장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고 말했다.
3. 연합의 기초.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은 “진리의 영”(요 15:26)으로서이다. 그분의 임무는 신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다(요 16:13). 그러므로 그리스도 중심적 진리가 연합의 기초인 것이 분명하다.
성령의 사명은 신자들을 “예수 안에 있는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학문은 하나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학문만으로는 참 연합을 이루어 내는 데 충분치 못하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를 믿고 실천하고 전도하는 것만이 참 연합을 이루어낸다. 교제와 영적 은사들과 사랑은 모두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들의 진가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말씀하신 분을 통해서만 발휘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연합을 경험하려면 신자들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비춰 나오는 빛을 받아야 한다. 예수 안에 있는 이 진리가 마음에 거할 때 그것은 생애를 품위 있게 만들고, 고양시키고 정결케 한다. 그리고 모든 편견과 알력을 제거한다.

그리스도의 새 계명. 사람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교회의 신자들도 피차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이 다른 이들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을 증명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2:39 참조).
예수님께서 친히 사랑의 원칙을 갈바리에서 최고도로 실천하셨다. 운명하시기 직전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앞서 말씀하셨던 명령을 확대시키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 13:34 비교). 그리스도께서 마치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들이 응분의 몫을 받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도록 요청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데 그것이 필요 되는 일이라면 그대들의 웃옷을 벗어 등을 채찍에 내어주고, 그대의 다른 편 뺨도 돌려 대고 거짓고소와 모욕과 조롱을 감수하고 상하고 꺽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매장되는 것도 불사하라고 요청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그대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불가능한 가능성.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지만 불가능한 것을 성취시킬 수 있으시다. 그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연합은 성육신적인 것으로서 육신이 되신 말씀(그리스도)을 통한 하나님과 신자들과의 연합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상호관계이다. 즉 포도나무의 공동뿌리를 통한 신자들의 연합이다. 끝으로, 그것은 십자가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즉 신자들속에 떠오르는 갈바리의 사랑에 뿌리를 박고 있다.
2. 십자가에서의 연합. 교회의 연합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처럼 우리가 사랑할수도,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임재하셔야 할 필요를 인정하게 되고,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신 분을 믿게 된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상의 각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그가 모든 나라 사람들, 인종, 피부색, 그리고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그들의 차이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각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신다. 연합의 뿌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까닭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좁은 소견은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경향이 있다. 십자가는 인간의 무지를 타파하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가격표를 붙인다. 십자가는 무가치한 사람은 전혀 없음을 보여준다. 모두가 소중하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면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의 못 박힘이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끌 것이라고 예언하셨을 때, 그분은 최대의 고난자이신 당신의 자석과 같은 인력이 당신의 몸, 즉 교회에 연합을 가져다 줄 것을 의미하신 것이었다. 하늘과 우리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 그리스도께서 건너신 심연은 보잘것없는 한 형제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거리나 촌락을 가로질러 작은 발걸음을 내딛게 한다.
갈바리는 “너희가 짐을 서로지라”(갈 6:2)를 의미한다. 그는 전 인류의 모든 짐을 지셨는 바, 그 짐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서로 돕도록 우리를 해방시켜줄 수 있도록 그분의 생명을 끊었다.

연합에 이르는 단계들. 연합은 자동적으로 오지 않는다. 연합을 이룩하려면 신자들이 몇 계단을 밟아야 한다.
1. 가정에서의 연합. 교회에서의 연합을 이룩하기 위한 이상적인 훈련장은 가정이다(본서 22장 참조). 가정에서 우리가 지혜로운 경영, 친절, 온유, 인내, 그리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사랑을 배울 때, 우리는 이런 원칙들을 교회에서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2. 연합을 목표로 삼으라. 우리가 성실하게, 의식적으로 연합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다면 결코 연합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이미 달성했다고 자부할 수 없다. 우리는 날마다 연합을 위하여 기도하고 세심하게 그것을 배양해야 한다.
우리는 의견의 차이를 최소화시키고 중요치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논쟁을 삼가야 한다. 우리는 분열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우리가 피차 동의하는 많은 고귀한 진리에 관해 말해야 한다. 연합에 대하여 말하고, 그리스도의 기도가 성취되도록 기도하라.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연합과 조화를 실천할 수 있다.
3.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일하라. 교회는 한 단위로서 함께 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관여하기 전까지는 연합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사명의 수행은 조화를 배우는 이상적인 훈련이 된다. 그것은 신자들에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거대한 권속의 일원이며 전체의 복리는 신자들 개개인의 안녕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봉사 사업을 통하여 영혼의 회복과 신체의 회복을 함께 결부시키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그들을 파송하실 때 그분은 같은 내용을 강조하셨다. 말씀의 전파와 치료가 그것이다(눅 9:2, 10:9).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전도(말씀의 선포)와 의료 선교 사업을 병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업의 국면들 중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수행되거나 어느 하나에만 완전히 치우쳐서도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하길 것처럼 균형, 즉 조화를 이루어 함께 일하는 것이 영혼을 위해 일하는 우리의 사업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교회 사업의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강력하게 복음의 초청을 세상에 보내기를 소망한다면 서로 밀접하게 협력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연합이란 효율성을 위한 통합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의 은유는 크든 작든 각 기관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해 준다. 경쟁이 아닌 협동이 당신의 전 세계적인 사업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연합은 십자가에서 그토록 장엄하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무아적 사랑에 대한 증거이다.
4. 전 세계적인 안목을 계발하라. 교회가 세계 각 곳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증진시키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참된 연합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국가적, 문화적, 혹은 지역적 고립주의를 피하기 위해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판단과 목적과 행동의 연합을 성취하기 위해 국적이 다른 신자들이 함께 섞이고 함께 봉사해야 한다.
교회는 교회의 연합된, 전 세계적인 전도사업에 저해 요인이 될 별도의 국수주의적 관심사를 조장시켜서는 안 된다. 교회의 지도자는 세계 다른 지역 사업의 발전을 희생시켜 가면서 어느 한 지역에 재정이 공급될 수밖에 없도록 프로그램이나 시설을 발전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평등과 연합을 유지하는 그런 방법으로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5. 분열시키는 태도를 피하라. 이기심, 교만, 자기 과신, 자만, 우월감, 편견, 비평, 비난 그리고 신자들 사이에서의 흠 찾기는 교회를 분열시킨다. 그리스도인 경험에서의 첫사랑의 상실이 흔히 이런 태도를 유발시킨다. 갈바리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때 서로에 대한 사랑이 새롭게 될 수 있다(요일 4:9-11). 성령을 통하여 전달된 하나님의 은혜는 육신적인 마음 가운데 있는 이러한 분열의 근원을 정복할 수 있다. 신약 시대에 한 교회에서 분열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울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고 그 교회에 권면하였다. 계속적인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를 연합으로 이끄실 성령의 지도를 구해야 한다. 성령 안에서의 행위는 분열에 대한 효과적인 해독제인 성령의 열매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맺는다(갈 5:22, 23).
야고보는 분열의 또 다른 뿌리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그는 강력한 어조로 부나 신분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을 책망하였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약 2:9).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시므로(행 10:34), 우리 는 지위나 부나 재능 때문에 어떤 교인을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을 존경할 수 있지만 그들이 가장 비천한 하나님의 자녀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 더 귀중한 인물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의 시각을 교정해 준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그분은 가장 유복한 신자들뿐 아니라 낮은 자로도 대표되셨다. 모두가 당신의 자녀인 까닭에 그분께 똑같이 중요한 사람들이다.
인자이신 우리의 주님께서 아담의 모든 아들과 딸에게 형제가 되신 것처럼 그분을 따르는 우리들도 정신과 사명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계 14:7)에서 나온 우리의 형제 자매들에게 구속적(救贖的)인 방법으로 대하도록 부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