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기본교리 28

제28장 새 땅

의가 거하는 새 땅에 하나님은 구속받은 자들을 위한 영원한 본향과 하나님 면전에서 영원히 살고, 기뻐하고, 배울 수 있는 완전한 환경을 마련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과 친히 함께 거하실 것이며, 고난과 죽음은 사라질 것이다. 대쟁투는 끝나고 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생물이나 무생물을 막론하고 만물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다. 아멘.-기본 신조, 28.

죽음이 임박한 것을 깨달은 한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본향은 하늘에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본향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 소년처럼 많은 사람들은 죽을 때에 하늘을, “다른 장소” 대신에 택할 수 있는 차선(次善)의 곳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곳은 이 땅의 현실 생활의 실체와 욕망에 비해 달갑지 않은 차선의 장소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 만일 많은 사람들이 내세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견해가 옳다면 이런 생각은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묘사와 시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구속받는 자들이 누리도록 준비해 두신 것은 현세와 비교할 수 없이 너무도 훌륭한 것이기 때문에 새 세상을 위하여 이 세상을 버리기를 주저할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새 땅의 특성
실제적인 장소. 성경의 최초의 두 장은 하나님이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셔서 인간의 본향으로 주신 것에 관하여 알려준다. 성경의 마지막 두 장 역시 하나님이 인류를 위하여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심에 관하여 말해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재창조, 곧 죄가 초래한 폐허에서 지구를 회복시키는 것에 대한 것이다.
거듭거듭 성경은, 구속받은 자들의 영원한 이 본향은, 실제적인 장소, 육체와 두뇌를 가진 실제적인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맡고, 재어보고, 묘사하고, 조사해 보고,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장소라고 선언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실제적인 하늘나라를 이 새 땅위에 두실 것이다.
베드로후서 3장은, 이 사상의 성경적 배경을 간결하게 요약한다. 베드로는 홍수 전의 세상을 “그 때 세상”이라고 말하고 물로 멸망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세상은 지금 존재하는 세상인데 “의의 거하는… 새 땅”을 만들기 위하여 불로 정결케 될 세상이다(6, 7, 13절).* “세번째”의 세상은 먼젓번의 두 세상과 똑같은 실제적인 것이 될 것이다.

계속성과 차이점. “새 땅”이라는 말은 지금의 세상이 계속되지만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불로써 모든 더러운 것이 정결해지고 새롭게 된 옛 세상을 바라본다(벧후 3:10-13; 계 21:1).* 그러므로 새 세상은 무엇보다도 어떤 다른 곳이 아니고 이 땅이다. 비록 새로워졌지만 그것은 친숙하고, 잘 알려진 본향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죄가 초래한 모든 폐해를 하나님이 땅에서 제거해 버리시기 때문에 그것은 새 것이다.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은 이 새 땅의 수도이다. 히브리어로 예루살렘(Jerusalem)은 “평화의 도성”을 의미한다. 지상의 예루살렘의 역사는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정확하게 그 이름의 뜻대로일 것이다.

연결시키는 고리. 어느 의미에서 그 성은 하늘과 새 땅을 연결시킨다. 보통 하늘(heaven)이라는 말은 “창공”(sky)을 의미한다. 성경은 그것을 (1) 대기권 하늘(창 1:20), (2) 별들의 하늘(창 1:14-17), (3) 낙원이 존재하는 “셋째 하늘”(고후 12:2-4) 등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한다. 낙원과 함께 하늘을 연결지어서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와 거처가 있는 곳인 낙원과 동의어가 된다. 그러므로 범위를 넓혀서 성경은 하나님의 영역과, 통치와, 그분의 치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분의 백성을 “하늘나라”로 지칭한다.
하나님께서는 새 예루살렘을 지구에 세우실 때,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고 주의 기도문에 나타난 간구를 훨씬 초월하여 응답하신다(계 21:1, 2). 그분은 지구를 일신시키실 뿐 아니라 그것을 높이신다. 이전의 타락한 위치를 벗어나서 그것은 우주의 수도가 된다.

물리적 묘사. 요한은 새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기 위하여 로맨틱한 말을 사용한다. 그 성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계 21:2)다. 그 성의 물리적 특성에 대한 그의 묘사는 우리에게 그 실제성을 인식케 해준다.
1. 그 성의 빛. 요한이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보았을 때 기록한 첫째 특성은 “그 성의 빛”이었다(계 21:9, 11). 하나님의 영광이 그 성을 비추어 햇빛과 달빛이 쓸데없게 되었다(계 21: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계 22:5).
2. 그 성의 구조. 하나님께서는 그 성을 세움에 있어서 가장 좋은 재료들만을 사용하셨다. 성벽은 벽옥, 곧 “지극히 귀한 보석”으로 되어 있다(계 21:11, 18). 그 성의 기초석은 열 두 개의 각각 다른 보석, 즉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자정으로 꾸며져 있다(계 21:19, 20).
그러나 이 보석들이 건축의 주된 재료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도성의 건물과 거리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것처럼 금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계 21:18, 21). 이 금은 오늘날 알려진 어떤 금보다 더욱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이 그것을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계 21:18)고 했기 때문이다.
각각 하나의 진주로 만들어진 열두 문은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진주는 고난의 산물이다. 작은 자극물이 조개껍질 사이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 작은 생물이 고통당함으로 그 자극물은 빛나는 보석으로 변한다. 그 문들은 진주로 만들어져 있다. 그대를 위한 입구와 나를 위한 입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려고 무한한 개인적 고통을 당하심으로 만들어주신 것이다.* 그 성의 건축에 사용된 재료들의 목록과 마찬가지로 요한에게 그 성을 보여준 천사가 그 성벽을 재었다는 사실이 의미있는 일이다. 그 벽들이 측정될 수 있었다는 것, 그것들이 높이와 길이와 두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데이터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그 성의 실제적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3. 그 성의 식사와 음료수. 성의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계 22:1). 많은 줄기를 가진 보리수와 같은 생명나무는 “강 좌우”에서 자라난다. 그 열두 가지 실과에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이래로 갖지 못한 채 지내온 생명의 요소, 곧 노쇠와 정력 손실과 단순한 피로를 없애는 해독제가 들어 있다(계 22:2; 창 3:22).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자들은 쉬어야할 밤이 필요치 않다(계 21:25). 새 땅에서는 그들이 결코 피로를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
성경은 최종적으로 구속받는 자들이 이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알려준다(마 5:5; 시 37:9, 29, 115:16).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아버지 집에 “처소”를 예비하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1-3). 우리가 이미 연구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보좌와 하늘의 본부는 이 땅에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자리잡을 것이다(계 21:2, 3, 5).

도시의 집. 새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고대했던 성이다(히 11:10). 그리스도께서는 그 큰 성안에 “처소”(요 14:2), 곧 원래의 말이 가리키는 그대로 “거할 곳”-실제적인 집-을 마련하고 계신다.

시골의 집. 그러나 구속받은 자들은 새 예루살렘의 성벽 안에 갇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땅의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그들의 도시 집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시골로 나가서 그들이 꿈구어 온 가옥들을 설계하고 세우며, 곡식을 심고 그것들을 추수하여 먹을 것이다(사 65:21).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거함. 새 땅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한 약속이 영원히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육신의 목적이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구원받은 자들은 여기에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살며, 그들과 교제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새 땅에서의 생활
새 땅에서의 생활은 어떠할까?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림.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은 자들을 당신의 나라의 직무에 참여케 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계 22:3-5, 5:10 참조).
우리는 그들의 통치의 영역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나라에서의 그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부분, 곧 구속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우주를 대상으로 봉사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그들이 경험한 것을 증거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것이다.

새 땅에서의 육체적 활동. 새 땅에서의 생활은 영원을 사모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무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의 우리의 가능성의 한계를 긋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구속받은 자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사 65:21)다는 성경의 약속을 이미 보았다. 건축은 설계, 축조, 설비, 그리고 개조나 개축의 가능성 등을 의미한다. 또한 “거한다”는 말에서 우리는 일상 생활과 관련된 활동의 전반적인 모습을 추리할 수 있다.
새 땅의 존재의 기초가 되는 주제는, 하나님이 본래의 창조에서 계획하셨던 것의 회복이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에게 한 동산을 주셔서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창 2:15)셨다. 이사야가, 사람들이 새 땅에서 포도원을 경작하겠다는 말했으니 과수원이나 곡식밭은 왜 없겠는가? 요한계시록이, 사람들이 거문고를 연주할 것이라고 했으니 나팔과 다른 악기들은 왜 없겠는가? 분명히, 사람의 마음속에 창조적 의욕을 심어주시고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 두신 분은 하나님이셨다(창 1:28-31).

새 땅에서의 사회 생활. 우리는 새 땅에서 영원히 교제하는 우리의 기쁨이 적지 않을 것을 알 수 있다.
1. 친구들과 가족. 우리가 영화롭게 되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된 후에도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을 식별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제자들은 그분을 식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마리아는 그분의 음성을(요 20:11-16), 도마는 그분의 신체적 모습을(요 20:27, 28),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그분의 생활 습관을(눅 24:30, 31, 35) 알아냈다.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그들의 개인적 이름과 특징을 여전히 지니고 있을 것이다(마 8:11). 우리는 지금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자들과의 교제를 새 땅에서도 계속할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사실, 하늘나라가 우리의 소망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거기서 나누는 상호간의 교제인데, 그것은 가족과 현재의 친구들과만 나누는 교제가 아니다. 그것의 많은 물질적 혜택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구주와 성령과 천사들과, 각 족속과 민족과 방언과 백성,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과 나누는 교제의 영원한 가치와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 것이다… 더 이상 망가진 성격, 분열한 가정, 깨어진 관계가 없을 것이다. 모두가 완전하고 건전할 것이다. 육체적·정신적 일치가 하늘과 영원을 완전케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혼 안에 친히 심으신 사랑과 동정은 거기서 가장 진실하고 가장 아름답게 발휘될 것이다. 거룩한 자들과의 순결한 교제, 축복받은 천사들과 각 시대의 성실한 자들과의 조화로운 사회 생활… 이것들은 구속받은 자들의 행복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
2. 결혼? 그리스도 당시의 어떤 사람이 거듭거듭 과부가 됨으로써 결국 일곱 남편을 갖게된 어떤 여자의 경우를 이야기했다. 그들은 부활 후에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지 물었다. 그것은, 만일 이 땅의 결혼 관계가 하늘에서 재연된다면 야기될 끝없는 혼란을 쉽게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답은 하늘의 지혜를 보여준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30).
그렇다면 구속받은 자들은 오늘날 결혼과 관련되어 있는 해택들을 빼앗길 것인가? 새 땅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어떤 좋은 것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고 약속하셨다. 만일 이생에서 이 약속이 이루어진다면 저 세상에서는 얼마나 더 확실히 이루어지겠는가.
결혼의 진수(眞髓)는 사랑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고 말한다(요일 4:8; 시 16:11). 새 땅에서는 아무도 사랑과 기쁨과 즐거움에 부족이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고독과 허무와 냉대를 느끼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결혼이 이 세상에서 기쁨이 되도록 계획하신 사랑이 많으신 창조주께서 다음 세상에서는 더욱 더 좋은 것, 그분의 새 세계가 이 세계보다 더 좋은 것처럼 결혼보다 더 좋은 어떤 것을 예비하고 계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새 땅에서의 지적(知的) 생활
지능의 회복. 그 나무(생명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2). 요한계시록은 “소성”을 “치유” 이상의 뜻으로 사용한다. 그것은 “회복”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아무도 병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사 33:24, 20).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결과로 구속받은 자들은 여러 세기 동안의 죄악이 초래한 육체적·정신적 난장이 상태를 벗어나서 자라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 영원은 무한한 지적 시야를 제공해 준다. 새 땅에서는 “불멸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결코 쇠하지 않는 기쁨으로 창조력의 경이, 속죄의 사랑의 신비를 탐구할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도록 유혹하는 잔인하고 기만적인 원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능력은 계발되고, 모든 가능성은 증진될 것이다. 지식의 획득이 정신을 피곤하게 하거나 정력을 쇠잔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가장 큰 기도(企圖)도 성취되고, 가장 고상한 욕망도 이루어지고, 가장 숭고한 갈망도 성취될 것이다. 그럴지라도 여전히 도달해야 할 새로운 높이, 경탄해야 할 새로운 경이, 깨달아야 할 새로운 진리, 정신과 영혼과 육체의 힘을 요구하는 새로운 대상들이 있을 것이다.”*

새 땅에서의 영적 추구.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영생도 무의미할 것이다. 영원을 통하여 구속받은 자들은 예수님을 더욱 많이 알고자 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곧 그분의 생애와 사업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그분과 더 많은 교제를 나누기 위하여, 그분의 비할 데 없는 사랑을 타락하지 않은 세계에 증거하기 위하여, 그분의 품성을 반영하는 품성을 더욱 완전히 소유하기 위하여 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구속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다. 그들은 그분 안에서 영원히 안식하고, 완전히 만족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섬기기 위하여 생애하셨고(마 20:28),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동일한 생애를 하도록 부르셨다. 오늘날 그분과 함께 일하는 그 자체가 상급이 된다. 흐리고 이로 말미암아 형성되는 관계는 새 땅에서 그분과 함께 일하는 더 큰 축복과 특권을 부가하여 제공한다. 그곳에서는 큰 기쁨과 만족으로, “지금의 종들이 그를 섬기”(계 22:3)게 될 것이다.
비록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천연의 보고(寶庫)를 연구하는 기회를 가질지라도 가장 인기 있는 학문은 십자가의 학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소유하도록 의도하셨던 정도까지 명석해진 지성으로, 죄의 눈먼 상태가 제거된 상태에서 그들은, 오직 이 곳에서는 그들에게 희망 사항일 수밖에 없는 그런 방법으로 영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들은 구원의 주제, 곧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길이와 높이와 넓이를 가진 주제를 영원을 통하여 그들의 연구와 노래가 되게 할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하여 구속받은 자들은 예수 안에 있는 진리의 보다 큰 전망을 언제나 갖게 될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매 주일마다 안식일 예배를 위하여 함께 모일 것이다.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사 66:23).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모든 악이 근절됨. 새 땅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약속 중 하나는 그곳에 있지 아니할 것에 관한 것이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하나님께서 모든 형태의 죄악, 모든 악의 원인을 제거해 버리실 것이기 때문에 이 모든 악들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성경은 생명나무를 새 땅의 부분으로 열거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나 어떤 다른 유혹의 근원을 그곳에 한번도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 좋은 땅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혈육과 마귀와 싸울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비록 죄로 더러워진 낡은 지구에서 이민한 사람으로 이루어질지라도 새 땅이 “새롭게” 남아 있을 것이라는 보증은 하나님께서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계 21:8)을 제거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분께서는 어떤 죄악이라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다.
“모든 저주의 흔적은 씻겨버린다… 오직 기억나게 하는 것 하나만이 남아 있다. 우리의 구속주께서는 그분의 십자가의 흔적을 항상 간직하실 것이다. 그분의 상처받은 머리, 그분의 옆구리, 그분의 손과 발에는 죄가 남겨놓은 단 하나의 잔인한 흔적이 남아 있다. 선지자는,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합 3:4)고 말한다…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갈바리의 상처는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분의 능력을 선포할 것이다.”*

이전 것은 기억되지 않음. 새 땅에 관하여 이사야는,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다”(사 65:17)고 말한다. 문맥에 비추어 그 구절을 이해할 때 구속받은 자들이 잊을 것은 옛 생활의 환란들임이 분명해진다(사 66:15을 보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훌륭한 일들, 그분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풍성한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죄로 더불어 싸운 이 전체적인 투쟁이 허지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성도들 스스로의 경험은 영원을 통하여 그들이 증거 할 내용의 핵심이 된다.
그뿐 아니라, 죄의 역사는,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나 1:9)는 보증의 주요한 요소를 이룬다. 죄가 빚어놓은 슬픈 결과에 대한 생각은 누구에게나 자살의 길을 다시 택하지 못하게 하는 영원한 방지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과거의 사건들이 요긴한 구실을 할지라도 하늘의 분위기는 그들의 고난에 대한 무서운 기억들을 씻어준다. 구속받은 자들에게 가책과 후회와 절망과 실망과 고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보장되어 있다.

새 창조를 믿는 믿음의 가치
새 땅에 관한 교리를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실제적인 유익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참고 견딜 수 있는 의욕을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럼을 개의치 아니하”(히 12:2)셨다. 바울은 미래의 영광을 깊이 생각함으로 자신의 용기를 새롭게 하였다. 그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6, 17)라고 말했다.

그것은 상급의 기쁨과 확실성을 가져다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21)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전 3:14)을 것이라고 되풀이한다.

그것은 유혹을 대항하는 힘을 준다. 모세는 “상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죄악의 낙”과 “애굽의 모든 보화”를 포기할 수 있었다(히 11:26).
그것은 하늘을 미리 맛보게 해준다. 그리스도인의 상급은 미래에만 있지 않다(엡 1:14).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계 3:20)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언제나 하늘나라를 함께 가지고 오신다.” 그분과의 교제는 “하늘이 마음속에 임함이다. 그것은 영광이 시작된 것이며, 바라던 구원의 임함이다.”*

그것은 보다 더 효율적인 삶으로 이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한 가치를 무시할 만큼 지나치게 하늘에 대한 관심이 큰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확고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내세를 믿는 믿음 그것이다. 루이스(C. S. Lewis)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대가 역사를 읽어보면 그대는 현세를 위하여 가장 많은 일을 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내세를 가장 많이 생각한 사람들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그토록 무능하게 된 것은 내세에 관하여 생각하기를 전반적으로 중지한 때문이다. 하늘을 목표로 삼으면 땅도 얻을 것이고, 땅을 목표로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눈사람을 만드는데 보다는 대리석 위에 상(像)을 조각하는데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영원히 살기 위하여 계획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내버려지기 위하여 태어난, 살고 나서 버려지는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자연히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 자신의 생애를 건설할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건설적인 영향을 사회에 끼친다).
“성령이 마음에 넣어주는 하늘의 주제들에 몰두하면 강한 동화력(同化力)을 소유하게 된다. 그 힘에 의하여 영혼은 향상되고 고상해진다. 그의 전망(展望)의 범위와 능력은 커지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사물의 상대적 비율과 가치는 더욱 분명하게 식별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낸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계는 하나님의 품성과 이 지구에 대한 그분의 원래의 계획을 크게 잘못 나타낸다. 죄가 지구의 외형적 표면을 너무도 크게 훼손시켰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 세계와 창세기 1장과 2장에 묘사된 낙원과의 관련을 좀처럼 상상할 수 없다. 오늘날은 끊임없는 생존 경쟁이 삶의 양상이 되었다.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더불어 싸워야 하는 믿는 자의 생애도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을 정확하게 묘사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자들을 위하여 계획하신 것, 곧 사단의 영향을 받지 않은 세계, 하나님의 목적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그분의 품성이 더욱 잘 들어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준다. 궁극적으로, 성경은 신앙이 없는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하여 새 땅을 묘사한다. 어떤 사람은, “에덴의 아름다움으로 회복된 지구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처럼 실제적이며, 그곳이 성도들의 영원한 본향이 될 것이며, 그곳에서 그들이 온갖 슬픔과 고통과 죽음에서 벗어나고 서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실히 반대했다.
그는 말하였다. “그럴 수가 없다. 그것은 바로 세상적인 방법이다. 그것은 악인들이 즐겨하는 방법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 최후의 보상을 포함하여 “종교는, 세상 사람들이 희망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간의 마음이 진정으로 희구하도록 내세에 누리게 될 복락들을 열거할 때 그들은 이런 방법이 참 종교가 취해야할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보다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것을 알려주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몰두되어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고, 다음에 오는 세상의 가치를 분별하고, 사랑많으신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아름다운 사물들을 식별하게 하는 데 있다.

영원히 새로움
이 낡은 지구에서는 “모든 좋은 것들엔 끝이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새 땅에 관한 기쁜 소식들 중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이 결코 끝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할렐루야 합창”에서 이런 가사를 볼 수 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 단 2:44, 7:27). 그리고 성경은 모든 만물이 그 노래를 함께 부를 것이라고 말한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대쟁투는 끝났다. 죄와 죄인들은 없어졌다. 온 우주는 깨끗해졌다. 오직 조화와 기쁨의 맥박만이 온 우주의 만물을 통하여 고동한다. 생명과 빛과 환희가 만물을 창조하신 분에게서 끝없이 넓은 우주로 퍼져나간다. 가장 작은 원자(原子)로부터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