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한국 재림교회의 시작과 역사

1. 초창기(1904~1910)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

1904년에 이민 길에 올랐던 이응현과 손흥조는 일본 고베에서 쿠니야 히데 전도사에게 재림기별을 듣고 침례를 받았다. 그들은 최초의 한국 재림교인이 되었다.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되어 귀국길에 오른 손흥조는 임형주를 만나 재림기별을 한반도에 전할 뜻을 모았다. 진남포로 돌아온 임형주는 이름을 임기반으로 개명하고 주변 지역에 동조자들을 모아 쿠니야 전도사와 필드 목사를 초청하였다. 일본 미션의 책임자였던 필드 목사는 한국에서 첫 네 개의 교회(선돌, 강대모루, 용동, 바메기)를 조직하고 일본 미션의 부속으로 한국 미션필드를 만들었다.

1905년 첫 번째 선교사로 스미스 목사가 내한하였다. 스미스 목사는 한국 재림교회의 선교 본부를 진남포에서 순안으로 옮긴 후 본격적인 사업 조직에 착수했다. 그는 첫 번째 여자 선교사로 내한한 샤펜버그(사엄태)와 함께 1907년 순안에 사역자양성학교를 세웠다. 1908년 9월 하순에는 러셀(노설) 의사가 내한하여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1908년 10월에는 지도력을 갖춘 버터필드(전시열) 목사가 내한하였다. 그의 내한과 더불어 한국 재림교회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겪게 된다. 첫째는 한국교회를 일본 미션에서 독립시켜 한국 미션(Korean Mission)을 설립한 것이다. 1908년 말에 조직된 한국 미션은 5개의 조직교회, 6개의 예배소, 155명의 교인으로 구성된 작은 선교 조직이었다. 둘째는 선교 본부를 평안남도 순안에서 한국의 수도인 서울로 옮긴 것이다. 1909년 9월에 서울시 북부의 월암동으로 선교 본부와 출판소를 옮겨 서울 시대를 열었다.

서울 본부시대가 열림과 동시에 선교사들이 속속 내한하였다. 왕거린(왕아시), 오버그(오벽), 그레이엄, 하워드 리(이희만) 등이 내한하면서 출판사업과 교육사업 등의 책임을 맡았다. 본부의 서울 이전과 선교사들의 내한으로 선교 역량이 갖추어졌다. 지도자들은 1910년에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을 네 개의 선교 구역, 곧 중선(서울), 서선(순안), 남선(경산), 동해안(원산)으로 나누고 본격적인 선교 체제를 갖추었다.

2. 선교기(1910 ~ 1919)

“각 동네로 보내시며”

1910년에 일본은 강제로 합병 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찬탈하였다. 이 시기에 한국 재림교회는 미션체제를 확립하고 매년 장막집회 형식의 연회를 통해서 한반도 선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10년 8월에 개최된 연회를 시작으로 1919년 조선합회가 탄생하기 전까지 6회에 걸쳐 한국미션 연회가 개최되었다.

1909년에 서울 본부 체제를 연 후, 1912년에 회기리로 본부를 이전함으로써 회기동 시대를 열었다. 특별히 대총회의 지원금으로 회기리에 본부 건물 및 인쇄소를 건축함으로써 선교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별히 교세가 서선 지역을 넘어서 동해안, 남선, 중선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멀리 제주도와 울릉도와 북간도에까지 이르렀다.

이 시기에 한국 재림교회의 선교기를 이끌어간 두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첫째는 본방인 지도자들이 등장한 것이었다. 1913년 제1회 의명학교 졸업생 들이 사역 일선에 나왔고, 1915년에는 정문국과 이근억이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성일, 수산나, 이도신 등 여성 지도자들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둘째는 각 기관들이 발전한 것이었다. 순안의명학교는 1911년에 하워드 리가 교장에 취임하면서 발전하였다. 1917년에는 목회자 양성을 위해 신학과를 신설하였다. 순안진료소는 1913년에 새 건물을 건축하고 순안병원으로 발전하였다. 러셀 의사와 함께 장경록, 강병찬, 김창세 등 본방인 의료진들이 봉사하였다. 출판사업은 1910년 10월에 최초의 월간지인 <세 텬ㅅ、 의 긔별>을 출판하였다. 1916년에는 <교회지남>도 발간되었다.

지도력의 확장과 각종 기관들의 성장으로 인해 선교사업이 확장되었다. 1916년 말 통계에서 안교생 수가 1700여 명에 이르는 등 한국은 동아시아지역에서 가장 발전하는 지역이 되었다. 1917년에 한국미션이 조선대회(The Chosen Conference)로 승격되었고, 1919년에는 조선합회(The Korean Union Mission)로 승격되었다.

3. 확장기(1919 ~ 1930)

“누룩과 같으니라”

1919년에 3·1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독립만세 운동이 시작된 다음 날, 상하이에서는 아시아지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 동아시아가 별도의 지회로 분리되어 원동지회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대회는 합회로 승격되었다.

1922년 들어서서 버터필드를 대신해서 오버그 목사가 합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교회는 일제의 포교 규칙에 따라서 재단법인으로 등록을 했다. 교리 체계도 확립하였다. 아울러 ‘조선 기근구제회’를 지원하는 구호 사업 에도 참여함으로써 사회 구제에 앞장서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불행한 일도 있었다. 1925년에 순안병원장 허시모로 인해 발생한 사건은 재림교회는 물론이고 서양의 선교사들에 대한 사회적 비판으로 확대되었고 재림교회의 사회적 이미지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등 지역사회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 위기를 극복하였다.

특별히 한국 재림교회의 확장기를 이끈 원동력은 선교사들과 본방인 사역자들의 조화로운 헌신이었다. 초창기 사역을 이끈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귀국하고 새로운 선교사들이 입국하였다. 1921년에는 하워드 리 목사가 귀국했고, 1922년에는 러셀이 귀국하고, 버터필드 목사가 전근되었으며, 1925년에는 스미스 목사가 영구 귀국하였다. 그들의 자리는 오버그 목사, 왓츠 목사, 조지 루 의사 등이 대신하였다. 이들과 함께 정문국, 이근억, 김례준, 최태현 등 안수 목사들이 협력하였고, 김석영, 김항목, 남상익, 김병룡, 홍신후 등 젊은 사역자들도 안수 목사 대열에 가담하였다.

1929년에 이르러 조선합회는 지방 조직을 모두 대회로 승격시켰다. 이로서 서선대회, 중선대회, 남선대회로 재편되었다. 1930년도가 시작되자마자 합회 본부와 시조사가 불에 타서 전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해 12월 새 건물을 준공하면서 한국 재림교회는 성숙기로 접어들게 된다.

4. 성숙기(1931 ~ 1938)

“너희도 온전하라”

1930년대 한국 재림교회는 경제불황과 허시모 사건, 시조사 화재 사건 등의 시련을 극복하면서 성숙기를 맞이하였다. 1931년 1월 제7회 합회 총회는 세 가지 결정을 내렸다. 첫째, 전도 활성화를 위해 경성에서 대전도회를 개최하기로 한 것이었다. 둘째는 순안의명학교에 있던 신학교를 서울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서울에서 병원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새로 건립된 시조사의 출판사업과 함께 선교와 교육과 의료사업을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됨에 따라 조선합회의 경성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1931년 경성대전도회는 매일 400~600명의 청중들이 참여하였다. 경성 전도회로 인해 개신교인들의 견제를 받기도 했지만 이 일로 재림교회는 선교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1931년에 신학교를 서울로 이전하여 조선합회사 역자양성소란 이름으로 회기리 교회당 날개방에서 신학교육을 재개하였다. 1931년 서울로 이주한 조지 루 의사는 서울에서 진료소를 운영하면서 경성요양병원 건축을 추진하여 1936년에 휘경리에 경성요양병원을 세웠다.

1933년에 교회지도자들은 세계경제공황으로 대총회의 지원이 줄어들자 조직 축소 및 감원 등의 조처를 취했다. 1935년 말에는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면서 재림교회의 선교적 결집력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1937년에는 의명 학교의 운영을 지역 주체들에게 양도하는 일도 발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위기에도 불구하고 전국 조직을 5개 지방 대회 체제로 개편하여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추진하였고, 1935년에는 선교 30주년 기념행사도 진행하였다. 1938년에는 서울 회기리에 경성삼육원을 세워 교육, 출판, 의료사업의 중심을 완전히 서울로 이전하였다.

이렇게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지역 체제를 구축한 오버그 합회장 시대에는 시련 중에서도 교회의 성숙기를 구축했다.

5. 수난기(1938 ~ 1945)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으니”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여 식민지 백성들을 수탈하였다. 특히 기독교를 핍박하기 위해 1939년에 종교단체법을 통과시켰다. 이와 더불어 선교사들을 모두 철수시키고 주요 교단들의 어용화, 군소 교단들의 해산을 추진하였다.

이에 선교사들은 1940년 11월 8일에 합회 평의원회의를 열고 부합회장에 최태현, 교육부장과 사역자 양성소장에 이성의, 시조사 총무에 박창욱 등을 임명하고 서울을 떠나 귀국 길에 올랐다. 선교사들이 떠나고 난 후 1941년 11월에 개최된 12회 합회 총회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역자들의 봉급을 줄이고 필요 없는 선교사들의 사택을 처분하는 등 고육지책을 추진해야만 했다. 그러나 일제의 본격적인 탄압을 제어할 방법은 없었다.

한국 재림교회를 향한 일제의 본격적인 탄압은 1941년 화강리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충남 청양군 화성면 화강리에서 재림 설교를 하던 정동심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화강리사건이 일어날 즈음에 일제는 재림 교회의 기관지인 <시조>와 <교회지남>을 폐간시켰다. 1942년에는 사역자 양성소를 폐교시켰다. 그리고 1943년에 들어서자 교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일제는 최태현을 비롯해 오영섭, 이성의, 김상칠, 박창욱 등 지도자들을 투옥하였다. 이 일로 최태현 목사가 6월에 순교하였다. 일제는 나머지 지도자들에게 교회 해산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1943년 12월 28일에 강제 서명에 의해 재림교회가 해산되었다.

해산 후 재림교인들은 지하교회 형태와 광야교회 형태로 신앙을 유지하였다. 지하교회는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혹은 교회에서 몰래 신앙생활을 하였다. 김명길, 임성원, 김석영, 전가혁, 최성훈, 신종균 목사와 같은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봉사가 있었다. 광야교회는 태백산, 가평 적목리, 지리산 등에 공동체를 세우고 재림신앙을 지켜나갔다. 조경철, 반내현, 신태식 등은 광야교회를 이끈 신앙의 거장들이었다.

6. 재건기(1945 ~ 1955)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9일 재림교인들은 청진동교회에 모여 교회재건위원회를 발족하고 “조선교회를 재건할 것”과 “조선합회 유지재단에 속한 동산 및 부동산을 1943년 12월 28일 이전으로 회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재건위원들은 경성삼육원을 돌려받고 삼육중학교 간판을 붙였다. 일본인 고급 간부들의 요양소인 서광장으로 운영되던 병원도 다시 돌려받고 경성요양병원을 다시 시작했다. 시조사는 매일신보사에서 회수하였다. 경성제국대 학에 넘겨주었던 조선합회 본부와 선교사 사택 등은 서울대학교로부터 환원을 받았다. 1945년 10월에 신도총회를 개최하여 임원들을 선출하고, 교육사업 재건 및 지방교회의 재건을 추진하였다. 1947년부터 선교사들의 재입국으로 선교, 의료, 교육사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1947년 9월에 각급 학교들이 개교했다. 중학교는 면목리에서 삼육중학교로 시작해 1949년 1월에 초급중학교의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에 태릉에 대학 부지를 마련하고 신학교와 중학교가 이전되어 삼육동 시대를 열었다. 1948년 6월에는 경성요양병원 부속 간호사양성소가 고등간호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이 외에도 각부사업이 재건되고 지역교회가 재건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재림교회의 기관들과 교회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서울이 회복된 후 선교사들이 임시로 들어와 한국교회의 명칭을 ‘한국연합회’로 개칭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후 1·4후퇴 때 교회는 조지 루 의사의 도움을 받아 부산, 거제도, 제주도 등지로 피난했다. 학교와 병원과 기관들이 피난지로 옮겨져 사역을 이어나갔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 무렵인 1952년 5월에 한국연합회 제16회 총회가 청주에서 개최되었다. 이 총회에서 남한을 3개 대회로 나누고 각 대회마다 중고등학교를 세우는 결의를 하였다. 아울러 ‘한국재림교회 사회사업 협회’를 창설하고, 군봉사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사회를 향한 재림교회의 신앙 신념들을 결정하였다. 1953년 전쟁이 종식되자 교회는 다시 복구작업에 착수하였다. 재산, 건물, 행정 및 신앙 프로그램을 재정비한 후 1954년 10월 19일 선 교 50주년 기념행사를 회기동 본부교회에서 거행하였다.

7. 약진기(1956 ~ 1965)

“누가 네 이웃이냐”

1956년 1월 연합회는 예언의 소리 방송부를 신설하기로 결의하고 방송 선교를 시작하였다. 서울중앙방송(HLKA)에서 방송을 시작한 이후 1960년에는 부산 문화방송, 1961년에는 서울 문화방송, 1963년에는 동아방송(HLKJ)에서 방송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통신학교가 발전하였다.

한국 재림교회는 1952년부터 구제위원회를 조직하여 구제활동을 전개하던 중 1955년 5월 2일에 한미민간구호협정에 따라 구호 단체로 등록하였다. 그후 1957년부터 연합회장이 구제위원장이 되어 구호사업에 적극 참여하였다. 1958년에는 구호봉사회로 명칭을 바꾸고 1965년 회원 단체로 운영될 때까지 눈부신 구호봉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59년에 이르러 교인 수 1만 명 시대를 열었다. 1960년대 들어서서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정치적 불안이 가속되었지만 한국 재림교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킨 채 구호와 선교사업에 매진하였다. 특별히 1960년 한국연합회 대강당 전도회, 윤치승 장로의 안면도 개인선교, 우필원 목사의 공중전도 등 다양한 선교 활동의 결과로 1961년 총회에서는 안교생수가 63,785명으로 보고되는 등 눈부신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해 6월에는 삼육신학원이 4년제 정규 대학인 삼육신학대학으로 인가를 받고 명실상부한 대학 운영을 시작하였다. 교세의 확장과 더불어 전국 선교 조직이 재편되었다. 해방 후 남한을 중한대회와 남한대회로 운영하던 교단은 전후 복구 작업을 진행하면서 남한대회를 영남대회와 호남대회로 나누었다. 1957년 12월에는 중한대회에서 강원도 지역을 분리하여 중동대회를 신설하였고, 1963년에는 중한대회에서 충청도 지역을 분리하여 중서대회를 신설하였다. 이로써 남한지역에 5개 대회 체제가 형성되었다. 1964년 삼일당 전도회와 선교 60주년을 치룬 한국 재림교회는 1965년 3기말 통계에서 안교생수 10만을 돌파하는 선교적 약진을 이루었다. 그래서 1965년 1월에는 영남대회를 경북대회와 경남대회로 분리해 사상 초유의 6개 대회 시대를 열기도 했다.

8. 변혁기(1966 ~ 1978)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한국 재림교회의 교세는 1966년 들어서 급격하게 감소하게 되었다. 1966 년 1월 94,108명이던 안식일학생수가 1967년 6월에 34,330명으로 급감했다. 이로 인해 1967년에 경남, 경북대회가 다시 영남대회로 통합되었고 1968년에 중한, 중동대회가 중한대회로, 중서, 호남대회가 서남대회로 통합되어 3개 대회 체제로 되돌아갔다. 아울러 사역자들을 감원하는 변혁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서울위생병원 신축을 둘러싼 문제도 발생하였다. 1968년부터 시작된 병원 신축공사는 선교사들에 의해 비공개적으로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병원 토지의 매각과 과도한 재정 지출이 문제가 되어 선교사들에 대한 불신이 커지게 되었다. 1971년 9월에 한국연합회장에 김이열 목사가 선임되어 본방인 지도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해 4월에는 호남대회와 중서대회를 다시 회복시켜 4개 대회 조직으로 재편하였다. 본방인 중심의 리더십 교체와 교적 정리 등과 같은 변혁의 결과로 1974년 제25회 연합회 총회는 한국교회의 재정 자립도가 90.7%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하였다. 그 총회 마지막 날인 11월 30일에는 서울위생병원교회에서 선교 7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 시기에 각 기관들도 발전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인 삼육신학대학은 1967년부터 신학과 외에 농업교육과와 가정교육과를 신설해 4년제 정규 일반대학인 삼육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73년에 ‘5일금연학교,’ 1974년에 ‘맹인전도사업’ 등이 시작되어 선교 프로그램이 다양화되었다. 서울위생병원은 1976년 새 병원을 신축하고 본격적인 의료사업에 돌입했다. 아울러 1960년대 말부터 미국 이민 붐이 일어나 이들에 의해 1969년부터 미주 한인교회들이 설립되었다.

1978년 2월 5일에 유형환 목사가 연합회장에 선임되었다. 한 달 후에는 중한대회 총회에서 중한대회를 동중한대회와 서중한대회로 분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로써 다시 5개 대회 체제가 구축되었다. 이로써 한국 재림교회는 변혁기를 지나 자양기로 들어섰다.

9. 자양기(1978 ~ 1991)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

1978년 제26회 연합회 총회는 동·서중한 분리를 확정하여 5개 대회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후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하여 자양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총회 직전에는 경산삼육고등학교 내에 삼육기술학원이 개원되었다. 총회가 마친 직후에 삼육산업전문학교와 삼육간호전문학교가 삼육농업전문대학과 삼육간호전문대학으로 각각 승격 개편되었다. 이로써 삼육대학을 포함해 3개의 고등교육기관을 운영하게 되었다.

1979년에는 충북 영동에서 3천여 명의 청년들이 참가하는 청년 야영회가 개최되었다. 1980년 들어서 시조사는 <재미있는 성경이야기>를 10만 부 인쇄하여 보급하였다. 대학은 1980년 11월 3일에 대학원 신학과를 인가받아 1981 년부터 대학원 교육을 실시하였다. 아울러 영양학과, 화학과, 음악교육과를 개설하여 대학생수가 1천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1982년 들어서 한국 재림교회는 삼육식품 설립 및 공장 건축을 완성하여 자양의 토대를 확실하게 구축하여 이듬해인 1983년에 자양연합회로 승격되었다. 1984년 11월 3일에는 윌슨 대총회장을 초청해 선교 80주년 기념 행사를 거행하였다.

1984년부터 국내외 구호봉사 활동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특별히 1985 년에는 ‘실업인협회’가 창립되어 선교 및 구호 활동에 적극 나섰다. 1987년 은 ‘현대인을 위한 건강세미나’ 프로그램이 도입되어 본격적인 ‘뉴스타트 전도회’ 시대를 열었다. 이 뉴스타트 운동은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KBS 방송을 통해 전국적인 신드롬을 일으키기도 했다. 1987년에 또 하나의 사업으로 ‘세계선교 아시아 방송국’(AWR-ASIA) 한국어 방송이 시작되었다. 자양 1기인 1895년과 1986년에는 서울위생병원과 부산위생병원에서 거액의 재정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위기를 극복하고 자양 2기를 1987년에 출범시켰다. 그리고 1991년 말에 성도 10만을 돌파하였다.

10. 성장기(1991 ~ 1999)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1991년 12월에 출범한 자양 제3기 한국교회의 선교 목표는 교인수 144,000명이었다. 이를 위해 ‘총력전도 95’의 표어 아래 몇 가지 중요한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1993년에 ‘재림연수원’을 설립하여 교역자들의 영성훈련장을 개설하였다. 1994년에는 케이블 TV 방송을 위해 기독교방송에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하였고, 1995년에 ‘미디어센터’를 만들어 방송, 인터넷, 위성전도 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을 추진하였다.

1992년 10월에 필리핀에서 천명선교사 제1기가 시작되었다. 그해 12월 1일 에는 사할린에 북방선교대학이 개교하였다. 1995년 ‘아드라코리아’를 출범하 면서 구호봉사 사업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하였다. 1993년에 전병덕 목사가 한국인 최초로 원동지회장에 피선되어 한국 재림교회의 세계적 역량을 드러내었다. 이런 선교 역량을 모아서 1994년 9월 3일에는 폴켄버그 대총회장과 더불어 잠실 올림픽 공원에서 선교 9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1995년 12월에 제30회 연합회 총회에서 자양 제4기 연합회가 출범하였다. 새천년을 앞두고 출범한 자양 제4기 행정부는 연합회 기구를 축소하고 연합회의 재정을 지역합회에 지원하는 등 구조 개혁과 더불어 신앙부흥 및 개 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대쟁투 총서 10만 세트 보급 운동(1996), 재림교회 성경주석 번역 사업(1999) 등 출판사업들을 전개하였고, 평신도훈련원 (1997), 수동요양병원(1997), 수동노인전문요양센터(1997), 여수에덴요양병원 (1996) 등을 설립하였다. 1997년 6월에는 북아태지회가 창립되어 경기도 일산에 본부를 두고 아시아 선교를 이끌게 되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8년부터 일어난 여러 문제들로 인해 회기 1년을 앞당겨 2000년 5월에 연합회 조기정기총회가 개최되는 아픔도 있었다. 이 시기에 한국 재림교회는 성장기를 경험하면서 새천년을 준비하였다.

11. 도전기(2000 ~ 현재)

“우리의 구원이 가까웠음이라”

새천년의 시작을 조기정기총회로 맞이한 한국 재림교회는 ‘Acts 2000 위성전도회,’ ‘선교100주년 기념 위성전도회’(2012년 11월)로 비전을 이어갔다. 이 시기 한국 재림교회의 화두는 제주 문제였다. 2001년 3월에 ‘제주교회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 제주교회의 자율적 운영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제주분리 문제는 2005년부터 뜨거운 이슈가 되었고, 2009년 1월 22일에 연합회 직할선교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2004년은 한국 재림교회가 선교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교회 지도 부는 2002년 말부터 선교100주년 기념위원회를 구성하여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였다. 기념식은 물론이고 역사를 점검하고 미래를 진단하는 프로젝트 들이 추진되었다.
2005년 4월에 27년간 전 세계 가톨릭을 지도하던 요한 바오로2세가 선종하고 그를 뒤이어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때 한국 재림교회는 “정체성 강화”를 화두로 선교 제2세기의 교회 기반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2006년에 교회는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재림신앙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별히 2008년 말에 교회 일각에서는 총회문화 개선, 교회조직 축소, 광역선교구역 등의 대안이 제시되면서 새로운 역사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해 주었다.
2009년 12월에 개최된 제33회 한국연합회 총회는 교회조직 축소의 한 대안으로서 ‘교회연합회’(Union of Churches) 제도 추진을 결의하고 행정조직연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행조위는 이 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삼육대 선교사회문제연구소에 위임하였고, 연구소의 보고서를 토대로 조직 개편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2010년 한 해 동안 뜨거운 논의 과정과 대총회의 권고로 추진을 중단하게 되었다.
2011년 12월에 개최된 총회에서 연합회장에 재임된 김대성 목사는 2013년에 ‘새힘 2015’ 프로젝트를 제시하여 한국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선교역량 강화 사업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