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사업

초창기
1904년, 6월 초순, 손흥조 씨가 일본 재림교회 전도사 쿠니야 히데에게 침례를 받고 최초의 한국인 재림교인이 되었습니다. 손흥조 씨는 돌아오는 배 안에서 임형주 씨(후에 基磐으로 개명)를 만나 자신이 배운 교리를 전해주었고, 임형주 씨는 진남포에 머물면서 쿠니야 전도사를 초청하여 1904년 8월 10일에 쿠니야 전도사가, 9월 13일에 일본 미순(Mission)장 필드 목사가 내한하여 50일 간 복음을 전하고 71명에게 침례를 베푼 후, 4곳에 최초의 한국 재림교회를 세웠습니다.

확장기
1908년, 한국 재림교회는 일본 미순(Mission)에서 독립하여 한국 미순(Mission)으로 조직되었고, 1914년 6월, 경산교회에 선교회가 조직되고, 다음 해인 1915년에 미순(Mission) 본부에 선교회가 조직됨으로 보다 조직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한국 재림교회는 활발한 선교활동에 힘입어 1916년 교회수가 18, 교인수가 860명, 예배소수가 32곳으로 성장하였고, 미순에서 대회로 승격하였습니다. 1919년 다시 합회(Conference)로 승격되었고, 평신도들의 선교정신과 교육, 의료, 출판사업에 힘입어 교세가 더욱 확장되었으며 1939년에 이르러 교회수 34, 교인수 3,698명, 안식일학교수 170여곳, 안식일학교 학생수 7,390명으로 증가되었습니다.

수난기
1940년 국제정세가 악화됨에 따라 선교사들이 철수하고, 교회 지도자들이 본방인으로 교체되었으나 1943년 2월 4일 일제에 의해 교회 지도자들이 검거되고, 동년 12월 27일에는 교회가 강제 해산되었습니다.

재건기
1945년 8·15 해방 후, 동년 10월 18-28일 신도대회를 개최하여 해산된 교단을 재건하였고, 1954년부터 1964년까지 평신도들이 참가한 대중 선교운동을 전개한 결과 1965년에 교인수 29,240명, 안식일학교 학생수 100,314명이 되었습니다. 1904년 이래 처음 50년 간 침례교인수가 연평균 100명, 1954-1959년에는 1,200명인데 비해 1960년 초엽에는 월평균 200명으로 격증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1963년 선교구역이 중한대회(서울, 경기), 중동대회(강원도, 제천, 단양), 영남대회(경상도), 중서대회(충청도), 호남대회(전라도, 제주도) 등 5개 대회로 분할 확장되었습니다.

이 후 한국 재림교회는 경제악화 등 여러 요인으로 급격히 약화되고 선교활동이 위축되었으나, 1969-1970년의 ‘한국추수’ 운동, 1975년 시작된 평신도 지도자학교, ‘목표 80’ 및 ‘목표 85’ 운동으로 교세가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며, 1983년에 이르러 외국 지원을 받지 않는 자양합회 체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이어 ‘추수 90 운동’, ‘총력전도 95’, ‘오메가 2000’ 등 과감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94년 9월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한국선교 9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면서 생명의 소중함과 인류애를 일깨우는 3천명 헌혈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2000년과 2003년에는 전국 400여개의 지역사이트를 설치하고 최첨단 시설을 이용한 위성전도회를 개최하였으며, 2004년에는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와, 선교 제2세기를 맞아 민족의 구원과 복음화를 위해 활발한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재림교회는 2019년 말 800여개의 교회와 26만여 명의 신도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