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는 요한계시록 7:4의 구원받을 십사만 사천 명을 실제적인 수로 보나요 아니면 상징적인 숫자로 보나요? 만일 상징으로 본다면 십사만 사천 명은 바로 뒤에 등장하는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같은 것입니까?
재림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십사만 사천 명을 상징적인 숫자로 봅니다. 십사만 사천 명이 실제의 수냐 아니냐 하는 논쟁에는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그리고 십사만 사천 명과 셀 수 없는 무리가 같은 무리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는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각각의 주장을 살펴보면서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지 생각해 봅시다.
1. 먼저 십사만 사천 명을 문자적으로 실제의 수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십사만 사천은 특별한 무리입니다. 그들은 살아서 갖가지 재앙을 다 견딘 사람들이며 이 사람들은“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계 14:4)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들밖에 알 수 없는 노래가 있으며 하늘에서 특별한
계급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 명이 구원받을 자의 수로는 너무 적은 수라고 하는 비평에 대해서 그들은 타협안을 내놓기도 합니다. 즉 5,000명을 먹이시는 사건에서 5,000명이란 숫자가 남자만 계수된 것을 봐서 십사만 사천 명도 같은 계수 방법을 따랐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훨씬 더 많은 숫자가 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십사만 사천 명을 실제적 수라고 보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첫째로 구원받을 자의 수를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구원의 성격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지 그 수를 제한한 일이 없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하나님 편에서 수를 제한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각 지파에서 정확히 12,000명만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구원이 너무나 기계적이 되고 숫자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십사만 사천 명이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현실성이 없게 됩니다. 12지파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각 지파에서 12,000명씩의 순수한 혈통이 남아 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십사만 사천 명이 만일 실제 수라면 계시록 7장의 많은 부분을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해석해야하며 실제로 이마에 인을 받는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한계시록은 상징의 책이며, 특별히 대부분의 숫자
는 해석이 필요한 상징입니다. 넷째로 십사만 사천 명이 실제적 수라고 믿으면 현재 살아 있는 지구의 인구에 비해 그 수가 너무나 적기 때문에 그 제한된 무리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십사만 사천 명이 실제 수라고 보는 개인이나 그룹은 십사만 사천이란 수를 상당히 제한적이고 폐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십사만 사천 명을 결혼하지 않은 성직자로 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사만 사천을 특별히 부활한 무리인 하늘 반열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들어가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기타 기성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십사만 사천 명을
강조하면서 자기들의 모임에 들어와야 구원이 있고, 십사만 사천 무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섯째로 십사만 사천 명이 실제적으로 그렇게 제한된 수이며 특별한 무리라면 하늘에는 십사만 사천 명으로서 구원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하나의 계급이 형성될 것입니다.
2. 반면에 십사만 사천 명을 상징적인 수라고 해석할 수 있는 증거는 많습니다. 우선 요한계시록 자체가 상징으로 풀어야 할 상징과 상징적 숫자로 가득 찬 책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7장에서 이스라엘 각 지파가 현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지파들이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거기에서 나온 십사만 사천이란 숫자도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만일 십사만 사천 명을 상징적인 수라고 보면 우리가 처음에 제기했던 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즉 영적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성도들로부터 각각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완전하고 충만한 수들이 하나님의
인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다음에 남은 문제는 요한계시록 7:4의 “십사만 사천 명”과 7:9의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과연 같은 사람들이냐 아니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두 무리가 처한 시간과 상황만 다를 뿐 동일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학자들은(Hoekema, Beckwith)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1) 십사만 사천 명은 큰 환난을 겪기 전의 무리이고,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큰 환난 후에 모인 무리로서 환난 전이냐 후이냐 하는 시기만 다를 뿐 같은 무리이다.
2) 십사만 사천 명은 멸망하는 천사가 아직 “땅이나 나무나 바다”를 해하기 전인 지상에 있고,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모든 것이 끝난 후 흰옷을 입고 손에 승리의 종려가지를 들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 즉 그들이 아직 지상에 있을 때와 하늘 보좌 앞에 있을 때를 비교한 것으로서 장소만 다를 뿐 동일한 구원받은 무리이다.
3)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내가 들으니”라고 말한 것과 “내가 보니”라고 말한 것은 결국 같은 사건이었다. 즉 처음에 들은 것을 나중에 확인했다는 것이다. 요한이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지만(7:4) 그것이 상징수였기 때문에 7:9에서 실제로 보좌 앞에 모인 것을 보니 “셀 수 없는 큰 무리”였다.
4) 그러므로 두 무리는 그들이 처한 상황과 시기와 장소가 틀리지만 결국 동일한 무리이다.
“십사만 사천 명”과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서로 다른 무리라고 보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폅니다.
1) “십사만 사천 명”은 재림 직전 살아서 마지막 대환난을 겪고“사람 가운데서 구원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계 14:4)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바쳐진 사람들이다. 요한계시록 7:9의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아온 사람들 중에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다. 그러므로 두 무리는 서로 다르다.
2) “십사만 사천 명”은 비록 상징적인 수일지는 모르지만 일단 셀 수가 있었던 무리이고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요한이 보기에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무리였다. 그러므로 두 무리는 서로 다르다. “십사만 사천 명”은 하나님의 인을 받고 환난에 들어가는 자들인 데 비해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이미 큰 환난을 통과한 자들이다. “십사만 사천 명”은 지상에 있지만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하늘에 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무리이다.
3) 두 무리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십사만 사천 명”까지 포함한 각 시대를 거쳐 구원받은 성도들의 무리이다. 즉 십사만 사천 명이 살아서 구원받아 다른 사람이 부르지 못하는 새 노래를 부르는 무리이긴 하지만(계 14:3) 특별한 무리로 계속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땅에서 구원받은 셀 수 없는 무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주장이 그래도 제일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사만 사천 명”의 신원에 대해 잘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란 성경에 계시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십사만 사천 명”이 실제의 수이냐 아니냐 혹은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같으냐 다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십사만 사천 명”의 아름다운 품성을 닮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확실히 알 수 없는 “십사만 사천 명” 같은 문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형제를 비난하거나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행동이 아니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