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로 말미암아 황폐화된 세상에서 탐욕과 전쟁과 무지의 쓰라린 열매는 증가하고 있다. 소위 “풍요한 사회”(1958년 미국의 경제학자 존 갤브레이스의 저서-역자주)에서 조차도 집 없는 이들과 빈민들은 늘어나고 있다. 매일 1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굶주려 죽는다. 20억 이상은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영양 결핍으로 매년 실명한다. 대략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굶주림-질병-사망의 [악]순환[의 덫]에 갇힌 채 살아가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그 같은 상황에 대한 책임이 본인들에게 있지만, 이러한 개인들과 가족들의 대다수는 대체로 그들의 통제범위를 넘어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또는 사회적 사건들로 말미암아 빈곤하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대변자를 찾았다. 봉사(Caring)기관들은 많은 경우 교회에 의해 시작되고 후에 정부 기관들에 의해 인수되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기관들은, 어떤 관념적인 이타주의를 떠나, 불우한 이들을 동정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그들의 최고의 관심[사]였다는 사회의 평가(/인식)를 반영하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빈곤한 환경에서 질병들이 매우 잘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절망과 소외, 질투와 원한의 감정들이 종종 반사회적 태도와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사회는 법정, 교도소, 복지제도들을 통하여 이러한 질병의 여파로 인한 비용을 떠맡게 된다. 이처럼 가난과 불행이 범죄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 [가난과 불행이 범죄의] 변명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동정의 요구가 거부되면 낙담과 심지어는 원한이 뒤따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동정에 관한 요구는 정당한 이유가 없지 않다. 그 이유는 어떠한 법 이론이나 심지어 사회계약 이론이 아닌 명백한 성경의 교훈에서 찾는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곧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이사야 58장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 귀중하다. 우리는 이 장에서 우리의 책임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12절).
그 부르심의 목적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 . .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6, 7절)는 것이다. 그래서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들로서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회복시키고 돌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자비와 사랑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을 수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품성을 세상에 나타내게 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역을 달성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로 따라 행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병자들을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낙담한 자들을 일으켜야 한다(누가복음 4:18, 19; 마태복음 14:14 참고). 그래서 16절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떠나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의 모본은 그의 제자들에게는 결정적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유다의 가식적 관심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응하신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6:11). 그리하여 우리는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산 떡”임을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있는 분리할 수 없는 것들을 또한 인식한다.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교회정책과 공공 정책들을 지원함으로써, 그리고 동정에 대한 개인적 혹은 연합된 노력으로써, 우리는 바로 그 같은 영적 노력을 증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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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명은 1990년 7월 6일에 인디애나 주의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대총회 회기에 대총회 회장인 니일 C. 윌슨에 의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세계 16개 지회장들과의 협의 후에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