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임박한 재림신앙은 기독교계의 공통신조였습니다. 그러나 18세기 초엽, 세대주의해석에 따른 복천년사상이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세기 초엽, 침례교인인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는 성경연구를 통해 복천년사상과는 달리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천년기 전에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러한 믿음은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성경의 예언연구를 주도하였던 학자들의 주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윌리암 밀러는 1831년부터 임박한 재림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는데, 약 200여 명의 개신교 목회자와 5만여 명의 평신도들이 초교파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이 재림운동으로 감리교회와 침례교회 등 기성 개신교회에 10여만 명의 새 신자들이 증가하는 큰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1844년 윌리암 밀러의 시한부 종말론은 큰 실망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출발은 윌리암 밀러의 이 같은 시한부 종말론을 극복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즉, 1844년 대실망 이후 윌리엄 밀러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종말론 신앙의 포기와 거듭되는 시한부적 종말론 주장으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성경을 깊이 연구하여 시한부 종말론이 비성경적인 견해임을 깨닫고 이를 극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믿는 새로운 무리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이 곧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개척자들입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도들은 윌리암 밀러의 시한부 종말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성소 봉사 신학, 신자의 신앙고백에 기초한 침례, 안식일의 언약 신앙, 영혼의 조건적 불멸 등의 교리를 발전시켰으며, 지성, 영성, 신체의 전인적 인간론과 구속적 교육관을 정립하였습니다.
세계 재림교회 역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s, 이하 재림교회)는 1860년에 교단 명칭을 채택하였으며, 1863년 세계선교를 위한 대총회(General Conference)를 조직하고 존 바잉턴(John Byington, 1798~1887) 목사를 초대 대총회장으로 선임하였다.
한국 재림교회 역사
1904년에 이민 길에 올랐던 이응현과 손흥조는 일본 고베에서 쿠니야 히데 전도사에게 재림기별을 듣고 침례를 받았다. 그들은 최초의 한국 재림교인이 되었다.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되어 귀국길에 오른 손흥조는 임형주를 만나 재림기별을 한반도에 전할 뜻을 모았다. 진남포로 돌아온 임형주는 이름을 임기반으로 개명하고 주변 지역에 동조자들을 모아 쿠니야 전도사와 필드 목사를 초청하였다. 일본 미션의 책임자였던 필드 목사는 한국에서 첫 네 개의 교회(선돌, 강대모루, 용동, 바메기)를 조직하고 일본 미션의 부속으로 한국 미션필드를 만들었다.